버리지 못하는 마음

정 총해 장로

수년 전에는 첫 손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 얼마 후에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이 세상을 떠나셨다. 이렇게 혈육의 생(生)과 사(死)가 교체되는 그 어간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 이 사실을 의식하면 할수록 어쩐지 이 세상은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는 하나의 여관방처럼 느껴진다. 새 손님인 손자들이 들이닥치자, 옛 손님인 할머니는 방을 비우고 그만 훌쩍 떠나셨다. 그러니까 나도 이제 서서히 짐을 챙겨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얼마 전에 병원에 가서 정기 검진을 받았다. 며칠 후,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니, 다시 의사를 만나러 오라는 통지가 날아 왔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 동안 운동을 못해 부쩍 몸무게가 불어 염려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혈당이나 콜레스테롤이 높다는 말일까? 아니면 내 몸 속에 무슨 암이라도 자라고 있다는 말일까? 내 딴은 오만 가지 생각을 다 해 보았다. 그래서 다시 의사를 만났을 때, 농담으로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시렵니까, 종신형을 선고하시렵니까? 왜 부르셨죠?"하고 물었더니, 의사가 웃음을 띄고 "부역형 (labor sentence)!"이라고 대답했다. 결과는 별 것이 아니었다. 콜레스테롤이 좀 높다고 하며 처방해 주는 약을 먹고 6주 후에 다시 검사해 보자고 했다.

나는 요사이 불치의 신병으로 6개월 밖에 더 살지 못하리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방사선과 약물치료를 중지하고, 병원 입원실에서 집으로 돌아와, 병상에 누운 체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암 환자를 생각하며, 그의 눈으로 내 인생을 재해석해 보고있다. 내가 지금부터 10년, 20년을 더 산다한들 나와 그분이 무슨 큰 차이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사람은 다 시한부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집사람더러 "여보, 앞으로 내가 몇 살까지 더 살 것 같지?" 했더니, "90세까지는 살 거요." 라고 대답했다. 아내의 예언이 적중한다고 치면, 내가 앞으로 살 날은 꼭 6,875일이 남은 셈이다. 이 계산된 날수를 말해 주니까, 아내는 그렇게 많이 남았느냐고 되려 놀라는 기색이다.

이 남은 날들을 실감하기 위하여, 그 다음 날 네모 칸이 쳐진 그래프 용지 공책을 사와서, 여섯 쪽도 채 안 되는 용지에 줄쳐진 6,875개의 네모 칸을 한정해놓고, 매일 한 칸씩 X표를 쳐서 말소(抹消)해가고 있다. 이렇게 해보니까, 아내가 그렇게 많이 남았냐고 놀라워하던 그 네 자리 숫자가 많기는커녕, 가시적(可視的)으로 날로 줄어만 가는 나의 남은 날짜를 보면 오히려 서글퍼진다.
 
노년기에 접어들어 집안살림부터 정리하고 싶은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요새 기업체가 살아남기 위하여 흔히 구조조정을 한다든지, 옹색해진 일반 생활인들이 자기 분수에 맞게 집이나 자동차를 축소(Downsizing)한다는 말을 자주 쓴다. 나도 정규직에서 은퇴를 하고, 또 내 나이 칠순이 넘었으니 분명히 모든 것을 축소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집안청소를 할 때마다 경험하지만, 방구석에 다시 참고하지도 않는 잡지나, 자주 쓰지도 않는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정말 허황한 생각이 든다. 나의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원망스러워 진다. 모두 버리기가 아까워 모아둔 것이 산더미가 되어, 이제 홀가분하게 살고싶은 나에게 오히려 귀찮은 짐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과다한 소비 경제가 오히려 내수산업을 부채질해주는 이 미국에서 "쓰레기를 묻지 않으면, 쓰레기가 당신을 묻어버릴 거요! (Bury the rubbish or it will bury you!)라는 이 말이 어쩌면 나를 꼬집어 한 말같이 들린다.

지금부터 생활축소를 단행해야 하는데, 내게는 집 크기를 줄이고 살림을 정리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될 수 있으면 자식들과 손자들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기려고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집을 둘러보았지만, 비싸기만 하고, 공간이 협소하고, 전망이 좋지 않아 선뜻 그런 데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초라하고 답답한 작은 집에 살다가, 경관이 더 좋은 넓은 집으로 옮기려 할 때는 환경적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럴 것이, 여태까지 살아온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무엇이나 "이거 내 것이야!" 하면서 자기 것으로 끌어 모으기 시작하는 유년기로부터, 꿈을 부풀리고 왕성하게 성장하는 청소년기를 거쳐, 결혼하여 보금자리를 꾸미고 세간을 널려 온 장년기를 지나면서, 이를테면 늘 확장하는 생활에만 익숙해 오다가, 갑자기 열악하고 협소한 생활 환경으로 바꾸려하니 그런 변화에 대한 적응이 힘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팽창을 지향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에 더더욱 그런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시한부 인생을 생각하니 생활정리를 서둘지 않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좀 '알차게 살아야지' 하는 소원과 여망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알차게' 살려면 우선 구태의연한 내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할 것 같다.알찬 생활의 반대는 껍데기 생활이 아닌가! 그렇다. 살림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아 있는 날 동안 내가 꼭 해야할 일의 우선 순위대로 활동을 선택하고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나로서는 일을 떠벌일 때가 아니고 일을 외곬으로 모아야할 때이다.  구약성경의 전도서 기자는 범사에 다 기한이 있다고 설파하면서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니,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전3:6)고 했다. 그렇다. 지금 내게야말로 많은 것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건강식을 위해서 비계가 붙은 고기의 군살을 베어내듯이, 우선 나의 허식(虛飾)의 군살부터 가차없이 베어내야 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다짐해본다. 이제 젊을 때 품었던 허황한 꿈들은 그만 꾸고, 앞으로 남은 내 삶의 현실이나 똑바로 바라보자. 없는 자가 있는 척하고, 모르면서 아는 척하고, 비천한 자가 귀족인체, 속된 자가 거룩한 척 하는 그런 자기 기만적인 허세(虛勢)는 다 버리자. 알맹이는 없으면서 거죽만 번지르르한 그런 허울은 이제 가발 벗듯이 몽땅 다 벗어 집어던지자.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우선 '알차게' 살려는 자의 정신적 기본자세가 아닐까?
   
나는 이제 겨우 살림을 줄이고, 군살을 빼는 가식(假飾) 없는 생활태도에 눈을 돌리게 되었지만, 이 세상을 값있게 살고 간 성현들의 생애는 모두 다 그러했다. 그들은 나처럼 노년기를 맞아 마지못해 살림을 축소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깨달은 자기 사명을 다하느라 자기의 의식주생활에는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 살아 계시는 한국의 고승 법정스님이 쓰신 '무소유'란 수필집에 이런 일화가 있다. 이분이 여행을 떠나다가, 누구에게 선물로 받아 자기가 성심껏 물주며 가꾸던 그 화초가 생각나서 다시 절간에 돌아와, 그 화분을 마을 사람에게 주고는 홀가분하게 다시 여행길을 떠났다고 한다. 도(道)를 따라 살고자 이미 출가(出家)한 몸으로 중생(衆生)을 위해 세상 속으로 나서는 그에게는 화초 한 포기의 소유도 방해물처럼 여겨져 처분해버렸다는 이야기다.

위대한 인도의 지도자 간디가 소유했던 물질적 전 재산이라고는 자기 옷을 짜 입는 조잡한 베틀 하나, 힌두교 경전 한 권, 돋보기 안경 한 개, 나막신 한 켤레 밖에 없었다. 그는 정말 소유물 축소화의 명수처럼 생각된다. 그는 이와 같이 생활용품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사는 지혜를 터득했을 뿐만 아니라, 허울 좋은 남의 과대한 평가에도 안주하기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라는 칭송을 불편하게 여겨, "그러한 말을 쓴 사람에게나, 나에게나, 모두 좋을 것이 없다.'마하트마'라는 칭송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한계와 내 존재의 무가치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한 글까지 남겼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9:58)고 하지 않았는가! 또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14:26)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내가, 내 분수에 맞도록 거처의 공간이나 살림 하나 줄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다.

어찌하여 내가 현재의 안일한 생활조건을 버리지 못해, 작은 집으로 이사가는 것을 망설이고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내가 아직도 속물(俗物)이라서 그렇다. 아직까지 내 일신의 평안보다도 더 귀중한 것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재산보다도, 내 일신의 건강보다도, 아니 내 생명보다도 더 귀하고 절실한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그런 것을 발견한다면, 그 보다 못한 것쯤은 손쉽게 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늦었지만, 그런 것을 찾으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혼신(渾身)의 힘을 쏟아, 점점 줄어드는 남은 날을 값있고 보람되게 살아가고 싶다. (2004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