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이 종한

이런 소식

90년대 후반의 한국의 정세는 어느 때와 같이 격렬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국회에서 의원들이 밀고 박치고 하는 장면을 TV에서 방영한 일도 허다하였던 모양이다.  우리에게는 이제는 이런 것들이 별로 신기한 것도 아니다.  며칠 전 이곳 신문에 난 한국사태도 의회당에서 농성하는 의원들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뉴질런드의 할렌스타인 (Hollenstein)이라는 와이셔츠를 만드는 회사는 상품의 선전을 위하여 한국 국회의원들의 격투장면을 잠시 동안 보여준 후 “비즈니스 셔츠 두벌에 50불”이라고 광고하였다.  격투 장면에는 흰 셔츠를 입고 잡아당기고 밀고 하는 장면도 있었다.  사실 말이지만 선전으로서는 기발(奇拔)한 아이디어였고, 한국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기분 좋게 그 셔츠를 즐겨 사 주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한바탕 웃었을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하여도 될 일이었겠지만 이런 일에는 예민한, 또 “국가 위신”이 그렇게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이 회사에 사과를 종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할 일이란 말인가.  내가 망신당할 일을 하였다면 가만히 수모(受侮)를 겪고 앞으로 그런 낭패스러운 일이 없도록 할 것이지 남에게 트집잡을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도대체 주먹을 휘둘러서 해결될 일이 이 세상에 몇 가지나 될지.  또 앞 뒤 생각 없이 위신이 깎였다고 남에게 대어드는 무모한 태도는 또 어디에서 기인(起因)한 만용(蠻勇)일까.  입맛이 씁쓸할 따름이다.


작은 천국

몇 주전의 일이다.  주일 아침에 교회 도서실에 가서 도서출납의 일을 하고 있는데 맛좋은 미역국 냄새가 난다.  총무일을 보시는 정 신자 집사님이 오늘이 미스 최 (최 지영 박사님이라고 해야 옳겠지만 동생 같아서 나는 그렇게 부른다.)의 생일이라고 한다.  미역국을 스티로폴 컵에 받아 마시면서 집사님의 치밀하신 가려(可慮)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가지가지 강정을 만들어 담고, 작은 일인용 케이크도 빼지 않고 차리셨고 그 위에 촛불까지 켜놓고 우리는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불렀다.  또 집사님의 디지털 사진기로 도서실 위원들이 미스 최의 둘러리로 서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이런 것 누가 시켜서 할 수 있으랴.  어떤 때는 미스 최가 아침을 먹지 않고 오는 것까지 다 알아서 아침 요깃거리를 마련하였다가 ‘얼른 먹어, 얼른 먹어,’ 하시며 채근하는 것이다.  그 은근하고 끈끈한 사랑의 언어가 사랑에 겨워 흘러 넘친다.  뚝뚝 떨어진다.  흡사 딸에게 하는 어머니의 정성과 애정이 거기에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일손을 멈춘다.  그리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천국(天國)까지의 거리는 정말 얼마나 될까 하고. 이 사랑하는 마음과 마음사이에 바로 틀림없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도 우리 교회의 별로 깨끗지도 않은 도서실 안에서 살아 계셔 행복하시고 함께 축복을 나눠주신다.  그 분이 틀림없는 사랑이시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정경(情景)이다.  그런데 도대체 땅 끝은 얼마나 먼 곳일까.  아프리카의 오지(奧地)일까.  꽁꽁 얼어붙은 극지(極地)일까.  나는 그 대답을 확실히 알만하다.  나는 감히 여기가 땅 끝이라고 믿는다.  사랑의 힘 외에는 아무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바로 ‘나’의 밖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극한 상황을 인식하고 사랑의 사역(使役)을 하여야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바울 사도께서는 틀림없이 말씀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얼마나 사랑에 인색한 것인가.  왜 그토록 인색하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오로지 이를 본받아 작지만 천국을 계속 구축(構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몸을 내어주어 불사르게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바울 사도께서 말씀하셨다.  허세부리지 말고 겸손히 사랑할 것이다.

이와 같은 진한 사랑의 나눔이 기초(基礎)가 되어 그 위에 가정 교회가 튼튼히 서고 우리 교회가 서야 할 것이다.  여럿의 작은 천국들이 우리 교회의 처처(處處)에서 구축되어 하나님의 사역을 하루 빨리 완성하여야 한다.  그 날을 위하여 함께 사랑하며 기도드릴 일이다.


자원 봉사

나는 미국에 와서 산지가 한국에서 산 것보다 한 십 이년이나 더 오래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오래 이 나라에서 살아왔으니까 이 나라를 좀 안다고 말 할 수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정은 다르다.  내가 이 나라에 대하여 또 이 국민에 대하여 아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인 것들뿐이다.  

막내가 소년단 이글 스카웃 프로젝트(Eagle Scout Project)로 택한 것은 내 생각에는 좀 무모한 것으로 많은 인력을 동원해야 끝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별로 가능성이 있어 보이질 않았다.  대체로 이런 일은 가족이 총 동원되어 이웃과 친지와 동직원들을 위시하여 소속된 교회나 사회단체 전반에 걸쳐 자원봉사자들을 구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에게 그런 일을 다 맡기고 아무에게도 부탁을 하지 않았다.  날이 가까워 올 수록 나는 답답한 생각이 났다.  게다가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마침 우리가 본 교회의 사명자 대회의 날짜를 피하여 날을 잡아놓고 일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다시 교회의 일정이 바뀌어 같은 날짜에 그 두 가지 일이 중첩되게 되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교회의 행사를 빠지고 그날 하루만이라도 집의 아이와 같이 일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 집 근처의 Wirth Park에는 Quaking Bog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것은 자그마한 연못이던 것이 수 백년을 두고 나뭇잎이 떨어져 물위에 뜬 지각(地殼)을 이루어 지금은 그 위에 나무(jack pine, maple등)가 서 있고 그 바닥은 솔이끼로 덮여 있는 좀 지질학적인 면에서 특별한 곳인데 근년에 털갈매나무(buck- thorne, shiny European)를 새들이 그 씨를 먹어 퍼뜨리는 바람에 이 늪지는 완전히 점령당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든 정도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이 털갈매나무를 이 늪지에서 제거하는 것이 그 프로젝트의 전말(顚末)이었다.  잎이 피기 전에 나무를 자르고 그 그루터기에 약처리를 하여 다시는 자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우리 아이는 Minneapolis Park and Recreation Board 직원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계획하여 그들이 온갖 연모를 대여하고 자른 나무는 그들이 chipper를 가져다 갈아서 공원길에 깔기로 하고 나무는 자원 봉사자들이 자르고 또 자른 것을 언덕위로 끌어올려 쌓는 것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Star Tribune의 Home and Garden의 편집자가 Park Board의 웹사이트에서 이 프로젝트를 보고 우리 아이에게 이메일로 연락을 취하여 털갈매나무의 사진을 곁들여 신문에 조그맣게 보도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것으로 자원 봉사자가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토요일, 2월 28일은 상상외로 날씨가 따뜻하였다.  바람 한 점 없었고 하늘은 맑게 개어 따뜻한 햇볕이 이제는 봄이 다 되었구나 할 정도였다.  그날 한 사십 여명의 봉사자들이 일을 하였는데 그 중의 네 명은 Park Board의 Website에서와 신문의 보도를 읽고 우리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저 자연환경보호를 돕고자 온 사람들이었다.  또 한 명은 우리 아이 학교의 선생님(우리 아이를 가르친 일이 없는 분이지만)이 나무에 관한 전공을 한 분이어서 역시 Website에서 보고 친구와 함께 와서 봉사하였다.  그러나 이런 뜻밖의 일보다 더 감동을 일으킨 봉사자는 바로 정 민철(John Paul Chung, 정 지석 집사님의 아들)군이었다.  정군이 오리라는 말을 나는 들어보지 못했었는데 그는 아침 일찍이 와서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 성인들이 많이 왔었는데 정군은 어느 성인 못지 않게 열심히, 또 꾸준히 일을 하였다.  정군은 몇 차례 유카탄 선교를 다녀왔고 나는 그가 그곳에서도 이와 같이 성실히 일을 하며 봉사하였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가 이민으로서 살고있는 이 나라에서 우리 자신이 주류(主流)화 되기 위하여서는 우리도 정군과 같이 미국인들의 자원 봉사 정신을 발휘하며 사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이런 점에서 정군은 틀림없이 우리의 모범이 된 것이다.

윤 동주 시인이 유년시절에 다니던 교회를 둘러보신 이 영길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어떤 인물을 배출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설교하신 것을 기억한다.  나는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 중에서 이 나라에 크게 기여하는 인물들이 속출되기를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리고 정군에게 큰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