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을 뛰어 넘어
(시편57:1-11)


임 준혁 목사

비디오로 한국 방송을 보았습니다. 피아노 연주회에서 어떤 학생이 열심히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손가락 네개를 가지고 열심히 피아노를 치는데 그것을 음대생들이 와서 보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다윗이 소위 “잘 나갈 때” 썼던 고백의 시가 아닙니다.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들고 신변에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았던 때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쓴 시입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했는지 본문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청년예배를 드리며 김 성주 사장이 세미나에서 간증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던 사업이 IMF가 터지니까 갑자기 300억이 없어져서 회사가 휘청휘청했답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왜 사람들이 회사가 망하면 야밤에 도주를 하는지 이해가 가더래요. 회사를 보니 도저히 가망이 없고, 자기도 도망을 하고 싶은데 기독교인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그때 기도를 했더랍니다. 기도를 하니까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생각이 오고 지혜가 오더래요. 계속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는 공인회계사, 변호사를 붙여주시고 회사를 매각해서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내 앞에 있는 문제를 보느냐, 아니면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내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청년들 깊숙이 들어가서 보니까 저 사람은 괜찮을 거 같은데 문제가 있고, 문제가 없는 사람이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내가 기도를 하느냐  오늘 본문을 보니까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서’다.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기 때문에 과연 문제는 내가 기도를 하느냐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을 만나느냐 하는 것인데 다윗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시작을 합니다. 과연 우리가 직장생활과 유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이 문제 앞에서 나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기도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것을 믿습니다. 왜? 그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두 번째, 삼절에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즉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 굴에서 숨어 지내는데 나는 잠을 잘테니까 너희들이 무기를 구해와라 혹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윗이 보여주는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게 아니라 나를 보고 계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청년들과 수련회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날씨가 나쁘지 않고 그냥 비가 왔습니다. 열심히 차들이 가는데 앞에 가는 트럭이 빙글빙글 돌더라구요. 그래서 그때 알았습니다. 길이 다 얼어있다는 것을 그래서 저는 천천히 가고 있는데 옆에 눈 쌓여 있는데 많이 보던 빨간색 차가 보이더라구요. 그래서 설마 하고 가서 봤더니 그곳에 청년들이 모여있었습니다. 계속가다 보니까 안개가 끼어 한치 앞이 안 보이더라구요. 다른 것은 생각도 안 나고 다들 무사히 오기만을 바라며 혼자 부흥회를 생각하면서 갔습니다. 한시간 반에서 2시간이면 갈 거리를 6시간에 걸려갔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보니까 야 그때 참 감사했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 보호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똑같이 보호해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길뿐만이 아니라 내 앞에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가. 내가 할 부분은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는 잘 모르지만 오 년 뒤, 십 년 뒤에 그때를 보며 그때 그랬었지, 저랬었지 하며 되돌아보면서 이것이 하나의 간증이 되고 체험이 되고 신앙의 성숙으로 이어지는 반석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지금 어려움 속에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거 보지 말고 다 내려놓고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부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감사하고, 아니면 말고,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겠지가 아니라 하나님 이 부분 속에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믿음 잃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 이 부분을 갖고 나아갈 때에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을 뛰어넘는 것을 믿습니다.

세번째 보니까 팔절에 네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 구절만 들으면 사울왕이 왕이 되는 기름을 붓는 식에서 하면 폼이 날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은 잡히면 죽는 상황인데 팔절을 통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는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세번째는 비젼입니다. 꿈과 비젼이 있을 때 환경을 뛰어넘습니다.

질문을 해봤습니다. 나의 비젼과 꿈은 뭔가. 꿈과 비젼은 초등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 안에 있으면 환경을 뛰어넘어서 꿈과 비젼이 나옵니다. 다윗은 이 어려움 속에서 내가 새벽을 깨우겠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80세였습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을 때 이스라엘이 망하고 나라가 없는 백성이었고, 바울이 세계 전도를 꿈꾸며 선교를 나갔을 때 3가지 가시가 있었고 (하나님께 기도하구요), 과거가 하나님 믿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잡아간 사람입니다. 이 꿈과 비젼은 나이와 환경과 건강과 과거를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생각이 나의 비젼이 되고 꿈이 되는 것입니다. 2주전에 마틴 루터 킹 데이가 있었는데 유명한 연설이 있습니다. 제가 연설의 한 부분을 읽겠습니다.

나는 꿈이 있다
오늘도 내일도 어려운 일은 첩첩이 쌓여있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다. 언젠가는 미시시피 주까지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리라고. 나는 꿈이 있다. 나의 사남매가 피부의 색깔로가 아니라 인격의 내용으로 판단되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이라고. 나는 꿈이 있다. 남쪽 앨라바마 주에서도 검고 흰 아이들의 손이 정답게 뭉쳐지리라고. 이 꿈만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망의 동산에서 희망의 반석을 캐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꿈만 놓치지 않는다면 미국 내에 꽉 차있는 불협화음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교향악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연설은 2004년도에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는 화장실도 백인, 흑인으로 나눠져 있고, 또한 식당도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버스를 타도 흑인들은 앉아서 갈 수 없고, 설혹 앉아 있었더라도 백인이 오면 양보를 해야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뛰어넘는 것에서는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꿈이 무엇인가를 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긴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는 어려위지면 내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단계 뛰어넘어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를 하고요, 하나님을 구원자로 바라보고요,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바라보며 나아갑니다.  지금 어려운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보면서 나아가니까 이런 문제가 언제 있었는지 별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을 해봤습니다. 눈이 많이 있으면 그런 조건은 개미들한테는 문제이지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눈을 치우고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문제이지 하나님한테 문제는 없지 않는가.... 우리는 예상된 결과를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문제 속에서 자포자기하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해 놓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요, 최후승리를 믿으며 나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문제를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볼 질문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인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가? 과연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순종하고 있는가? 등등입니다.